예술적 생활, 생활적 예술
알록달록 감성을 자극하는 이곳, 감천문화마을입니다.
2009년 주민과 예술가가 힘을 합쳐 도시재생사업을 시작해 지금은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죠.
이곳을 다녀가는 관광객만 연간 200만 명.
지금은 알록달록한 감천문화마을이지만, 마을이 형성된 1950년대는 어땠을까요?
감천동 산골짜기에 마을이 들어선 것은 1955년, 태극도 신자들 4,000여 명이 집단 이주하면서였습니다.
태극의 문양처럼 조화로운 도를 믿었던 태극도 사람들은 중구 보수동에 본부를 두고 있었는데요,
부산시가 도심의 기능을 바로 세우기 위해 판잣집을 철거하려고 하자 합의 끝에 터를 옮기기로 한 것입니다.
당시 감천의 원주민은 30여 가구가 전부였으니, 살 집도 없는데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습니다.
태극도 사람들은 살고 있는 보수동 판잣집을 헐어 판자때기를 감천동까지 운반했습니다.
그리고 감천동에 도착해 가져온 자재로 집을 다시 조립했어요.
이웃의 볕을 가리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사람들은 비탈진 땅을 계단식으로 만들고, 민둥산에 나무를 심고, 우물과 하수관을 정비하고, 학교와 병원을 세웠습니다.
기반 시설이 하나도 없었던 골짜기는 불과 몇 개월 만에 약 800세대가 거주하는 마을로 변모했어요.
중장비 도움도 없이 태극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감천2동의 탄생이었습니다.
태극도 신자들이 모여 사는 이 마을은 태극도마을로 불렸습니다.
태극도마을은 한때 주민이 2만여 명에 달할 정도로 컸지만, 1970년대 이후 태극도의 교세는 점차 쇠퇴했어요.
주민들은 종교보다 경제에 더 매달렸습니다.
소득이 늘면서 태극도마을의 판잣집은 슬레이트집으로, 현대식으로 점점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태극도마을에서 감천문화마을로, 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사진 제공 : 사하구
《이야기 공작소 부산 : 3호 [2024] 안녕한 사하》, 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2024.
「묘지 위에도 판잣집 뚝딱...피란수도 곳곳 필사적 생존 흔적」, 《국제신문》(https://www.kookje.co.kr/), 2023.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