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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뒤를 돌아보다, 망후촌의 탄생

참고

  • 《이야기 공작소 부산 : 3호 [2024] 안녕한 사하》, 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2024.
  • 「망후마을」, 향토문화전자대전(https://www.grandculture.net/).

“그가 제법 장대하고 실하게 보이더니, 어찌 이렇게도 빨리 죽었단 말인가.”

“그는 담력이 커 국가가 믿고 의지할 만하였다. 그런데 도리어 흉악한 무리의 꾐에 빠져
헛되이 죽고 말았으니, 애석할 뿐이다.”

『인조실록』 47권, 24년 6월 17일

인조 임금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 사람,
바로 임경업 장군(1594~1646)입니다.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싸우려 했던 그가 역모로 몰려
고문을 받던 중 죽었다는 소식
을 듣고 한 말이에요.
임경업 장군이 역모에 가담했다고 거짓으로 고한 사람은 김자점(1588~1651).
청나라에 빌붙어 권력을 이어가던 간신이었습니다.

임경업 장군이 죽자 그의 조카인
임중생은 불안해졌습니다.

역모는 대역죄, 역모에 가담한 자의 가족까지
깡그리 멸하는 것이 국법이었으니까요.

평안북도 의주에 살고 있던 임중생은 죽음을 피해 도망치기로 합니다.
신분을 속이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고달픈 피신 끝에 마침내
자리 잡은 곳은 신평 땅이었습니다.

신평에 숨어 살면서도 임중생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 잡으러 오지 않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지요.

임경업 장군의 조카가 숨어 살았다는 마을은 그래서 망후촌으로 불렸습니다.
‘뒤를 돌아보다’라는 뜻을 가진 독특한 이름이지요.

신평에 망후촌 말고도 임경업 장군과 관련 있는 이름이 하나 더 있습니다.

신평 뒷산에 있었다는
고석암입니다.

사람들은 외롭게 홀로 선 바위를 보며 임경업 장군을 떠올렸습니다.
임경업 장군의 호가 ‘외로운 소나무’라는 뜻의 고송(孤松)이었거든요.
아마도 고송을 빗대 고석으로 부르지 않았을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청나라 황제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한 임금과
청나라에 빌붙은 간신배.

실망과 분노를 느낀 백성들에게 임경업 장군은 나라의 자부심을 일깨워 준 영웅이었습니다.
망후촌과 고석암에 얽힌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마음이 여기 신평에 남아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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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바다가 만나는안녕한 그곳.